솔직히 저는 빈혈 수치가 정상이면 혈액에 문제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상주 경천대 오르막이 갑자기 거대한 벽처럼 느껴지던 그날까지는요. 충분히 쉬어도, 훈련을 줄여도 나아지지 않는 피로. 나중에 알고 보니 문제는 헤모글로빈이 아니라 페리틴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 과정에서 제가 배운 것들을 솔직하게 정리한 기록입니다.

페리틴수치, 왜 따로 확인해야 하는가
헤모글로빈 검사만 받고 "정상"이라는 말을 들으면 안심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병원에서 헤모글로빈 수치를 확인했더니 정상 범위였고, 그래서 한동안 "몸 상태가 안 좋은 건 그냥 훈련 피로겠지"라고 넘겼습니다.
그런데 운동 전문가 지인이 페리틴(Ferritin) 수치를 따로 확인해보라고 했습니다. 페리틴이란 체내 철분 저장량을 반영하는 단백질 수치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지금 당장 혈액 속에 도는 철분이 아니라 몸속 창고에 쌓아둔 철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헤모글로빈은 정상이었지만 페리틴은 현저히 낮았습니다.
철분은 마이오글로빈(Myoglobin)의 핵심 구성 성분입니다. 마이오글로빈이란 근육 세포 안에서 산소를 저장하고 운반하는 단백질로, 운동 중 근육에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합니다. 저장철이 고갈되면 이 마이오글로빈 합성이 줄고, 결국 아무리 열심히 페달을 밟아도 근육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떨어지는 빈혈 단계가 오기 한참 전부터, 이미 몸속에서는 산소 공급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는 겁니다.
지구력 운동선수의 30~50%에서 완전한 빈혈 없이도 철분 결핍이 발견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출처: British Journal of Sports Medicine). 이 수치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설마 그렇게 흔한가"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겪고 나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됐습니다.
라이더에게 철분 결핍이 잘 생기는 이유
철분 결핍이 일반인보다 지구력 운동선수에게 더 흔하다는 사실, 어떻게 보면 역설적이기도 합니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결핍되기 쉽다는 건데, 여기엔 몇 가지 구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땀을 통한 철분 손실입니다. 저는 상주 여름 뙤약볕 아래 3~4시간씩 달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땀 한 방울 한 방울에 미량의 철분이 포함돼 있어 누적 손실이 생각보다 큽니다. 거기에 거친 노면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전달되면서 적혈구가 파괴되는 족저 용혈(Foot Strike Hemolysis) 현상도 자전거에서 유사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현상은 반복적인 물리적 충격이 적혈구막을 손상시켜 철분 재활용 효율을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저한테는 식단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체중을 줄이겠다고 고기를 거의 끊고 채소 위주로만 먹었습니다. 채소에도 철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식물성 철분(비헴철, Non-heme Iron)은 동물성 철분(헴철, Heme Iron)에 비해 체내 흡수율이 훨씬 낮습니다. 헴철은 흡수율이 15~35% 수준인 반면, 비헴철은 조건에 따라 2~20%에 그칩니다. 훈련 강도는 올리면서 철분 공급은 반토막을 낸 셈이었습니다.
여성 라이더라면 더 주의가 필요합니다. 월경으로 인한 주기적인 혈액 손실이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스탠포드 의과대학 연구를 포함한 대규모 코호트 연구들은 여성 지구력 운동선수에서 철분 결핍률이 일관되게 더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출처: Medicine & Science in Sports & Exercise).
철분 결핍이 VO2max와 회복력에 미치는 영향
철분 저장량이 줄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제가 직접 겪어봐서 압니다. 익숙하던 경천대 오르막이 갑자기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90rpm 케이던스를 유지하기도 버거웠고, 평지에서 조금만 속도를 올려도 심박수가 비정상적으로 치솟았습니다.
이게 단순한 컨디션 저하가 아닌 이유가 있습니다. 철분이 부족해지면 VO2max(최대 산소 섭취량)가 감소합니다. VO2max란 운동 중 신체가 1분 동안 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산소의 양을 의미하며, 지구력 경기력을 결정짓는 핵심 지표입니다. 이 수치가 떨어지면 같은 강도로 달려도 체감 노력도(RPE, Rate of Perceived Exertion)가 높아지고, 몸이 실제보다 훨씬 힘들다고 느끼게 됩니다.
회복력도 눈에 띄게 떨어졌습니다. 라이딩을 마친 다음 날에도 다리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 느낌이 계속됐습니다. 철분 결핍 상태에서는 훈련 자극에 대한 신체 적응 자체가 억제됩니다. 열심히 훈련한 게 체력으로 쌓이지 않고 그냥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증상들이 과훈련이나 단순 피로로 오인되기 쉽다는 점이 철분 결핍을 더 오래 방치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철분 결핍이 의심될 때 나타나는 증상들이 있어요. 저도 대부분 해당됐는데, 원인을 모르겠는 지속적인 피로감이랑 기력 저하가 먼저 왔어요. 평소 라이딩 강도에서 심박수가 비정상적으로 치솟는 것도 신호입니다. 익숙하던 오르막이나 구간이 이전보다 훨씬 힘들게 느껴지는 것, 라이딩 후 회복에 평소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예요. 가벼운 운동에도 숨이 빨리 차오르는 느낌이 들거나, 감기나 잔병치레 빈도가 늘어났다면 철분 결핍을 의심해볼 만합니다. 저는 이 증상들을 훈련 피로나 나이 탓으로 넘겼다가 한참 방치했어요. 이 중 두세 가지 이상 해당된다면 페리틴 검사 한 번 받아보시는 게 맞습니다.
실제로 해본 회복 과정, 솔직하게 말하면
회복이 빠를 것이라는 기대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솔직히 그 기대가 독이 됐습니다. 식단을 바꾸고 두 달 만에 경천대 오르막이 예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건 맞습니다. 그런데 그게 완전한 회복은 아니었습니다. 페리틴 수치가 정상 범위로 올라오는 데 두 달 이상이 걸렸고, 실제 체력이 따라오기까지는 더 걸렸습니다. 중간에 조급해서 강도 높은 라이딩을 무리하게 했다가 회복이 오히려 늦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바꾼 것들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소고기나 돼지고기 같은 헴철 공급원을 주 3회 이상 챙겨 먹기 시작했고, 흡수율을 높이기 위해 철분 섭취 시 비타민 C를 함께 먹었습니다. 그리고 식후 커피를 2시간 뒤로 미루는 습관을 들였는데, 커피와 차에 포함된 탄닌(Tannin) 성분이 철분 흡수를 방해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였습니다. 탄닌이란 폴리페놀 계열 화합물로, 소화기관에서 철분 이온과 결합해 불용성 복합체를 만들어 흡수를 억제합니다. 이 습관 하나 바꾸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라이딩 후 커피 한 잔이 오래된 루틴이었거든요.
철분제 보충제가 더 빠르지 않냐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의사 상담 없이 임의로 먹는 건 권하지 않습니다. 철분은 과다하면 산화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오히려 독이 됩니다. 경구 철분제는 위장 장애를 일으키기도 하고, 고강도 훈련 기간에는 흡수 효율이 낮아질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전문의 상담 후 수치를 보고 결정하는 게 맞습니다.
비싼 휠셋이나 파워미터를 장바구니에 넣기 전에, 저는 지금 몸속 페리틴 수치부터 확인하길 권합니다. 장비가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철분 결핍 회복은 장기전입니다. 빠른 효과를 기대하지 말고, 꾸준한 식단 관리와 충분한 회복 라이딩을 병행하는 것이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빈혈 수치가 정상이어도 이유 없이 힘들다면, 페리틴 검사 한 번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의료 조언이 아닙니다. 지속적인 피로나 증상이 있다면 반드시 전문의 상담을 받으시기 바랍니다.